연재 4화-전쟁의 발발과 국가 존망의 위기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 서울의 밤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한강 위를 가로지르던 한강 인도교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피난민과 군 차량이 뒤섞인 다리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교량 파괴가 아니라 서울 함락의 상징이자 전쟁 초기 국군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묻는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폭파가 잘못된 결정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1. 72시간 만에 붕괴된 서울 방어선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전면 남침을 시작했다. 전쟁 양상은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다. 북한군은 T-34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동전을 준비했고, 국군은 전차 한 대도 없는 상태에서 구식 대전차포에 의존했다.
북한군은 T-34 전차 242대, 자주포 176문, 장갑차 54대 등 대규모의 기갑 전력을 갖춘 상태였다. 국군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겨놓은 구식 57밀리 M1 대전차포 117문이 전부였다.
전황은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6월 26일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하고, 6월 27일 서울 외곽-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은 한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설정했고, 한강의 교량 폭파는 시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였다.
2. 번복된 명령과 혼선 속 교량 폭파
육군본부는 6월27일 11시에 긴급회의를 열고 서울 철수와 한강 인도교 폭파를 준비했다.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면 2시간 후에 폭파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지시를 받은 ‘교량 폭파조’는 철교와 인도교에 폭약 7000파운드를 설치했다. 회의할 당시엔 북한군이 27일 14:00에 서울에 진출할 것으로 판단해 16:00에 폭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했다. 긴급회의를 마친 후 육군본부의 주요 직위자들은 12시에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철수했다. 뒤따라간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인 라이트(William H. Wright) 대령은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 “곧 중대한 결정이 있을 것이니 서울로 복귀하라”는 전문을 받았다. 이 전문을 접수한 육군본부는 서울로 복귀했고, 한강 폭파계획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교량 폭파조는 철교에 설치된 폭약 장치 일부를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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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황이 악화하자 27일 23:30분에 다시 폭파 준비 명령이 하달되었다. 폭파조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폭약을 재장전했다. 28일 새벽 1시 30분경 서울 외곽 미아리 일대에 북한군 T-34 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자, 육군 총참모장은 즉각 폭파를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최병덕 공병감은 2시 30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당시 지휘 계통은 총참모장(채병덕)-참모부장(김백일)-공병감(최창식)-공병학교장(엄홍섭) 순이었다.
총참모장이 한강 인도교를 건널 즈음 제5사단장(이응준 소장)이 참모부장(김백일 대령)에게 ‘전방부대가 한강교를 건넌 후에 폭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참모부장은 작전국장(장창국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중지하도록 명령했지만, 통신이 끊어져 새벽 2시 30분에 폭파되었다.
3. 군사적으로는 정당, 그러나 시점이 문제
전쟁에서 교량 폭파는 일반적인 지연작전의 일부이다. 적 기갑부대의 진격을 늦추고, 방어선을 재편성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수도 서울이 38도선에서 45km에 있고, 한 시간에 55km를 진격할 수 있는 T-34 전차 능력과 전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한강의 인도교 폭파는 북한군의 남하를 수일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핵심 쟁점은 폭파 시점이다. 1950년 6월28일 새벽 국군 일부 부대는 아직 한강 북쪽에서 전투 중이었다. 군과 경찰이 통제한다고 했지만, 많은 피란민과 군 차량이 다리 위에 밀집돼 있었다. 국군은 많은 장비를 버린 채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군사편찬연구소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강교 폭파로 1300여 대의 군 차량이 유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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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명 피해, 왜 아직도 논쟁인가?
한강 인도교 폭파에 따른 인명 피해는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 출처에 따라 최소 100명 최대 800명으로 각기 다르다. 폭파한 위치는 한강 인도교의 중지도 남단이며, 교량 제2·3 상판이 파괴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 종군기자(Crane, Gibney, Beech)의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경고 없이 발생한 폭발로 100여 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희생되었다. 그들이 탄 지프차는 발파 지점에서 불과 20야드(19m) 떨어져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2.5톤 군용트럭이 날아가면서 그 폭풍을 막은 덕분에 살았다”고 증언했다. 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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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임인가. 불가피한 선택인가?
이 사건은 한강교의 조기 폭파 결정, 민간인 통제 실패, 지휘체계 혼선 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오랫동안 무능한 ‘지휘 실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특히 당시 육군 총참모장(채병덕 장군)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고, 공병감(최창식 대령)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이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더 균형 잡힌 평가를 제시한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는 군사적으로 필요했으며, 전쟁 초기의 불확실한 상황과 혼란 속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다만, 통제와 타이밍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6. 이 사건이 남긴 질문과 역사적 교훈
1950년 6월28일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는 전쟁 초기 대한민국이 겪은 혼란과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민간인 희생과 군의 혼선은 분명 비극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단순한 ‘실수’이거나, ‘학살’이 아니다. 전쟁 초기 극도의 혼란 속에서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급박하게 전황을 판단하면서 일어난 복합적인 사건이다. 그러함에도 우리에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완벽한 선택이 가능한가?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위기 상황에서 지휘 통제(C2), 군사 결정과 민간 보호의 균형, 정보 전달체계의 중요성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작금의 안보 정책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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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열 박사는 한미연합사령부·국방부·육군 등에서 대미(對美) 정책업무와 전쟁사를 담당했다. 전쟁사, 한미동맹, 국제 평화활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육군 군사연구소 등을 거쳤다. 저서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제2보병사단사>, <현리·한계 전투(共著)>, <한미동맹 60년사(共著)> 등이 있다. 화랑무공훈장, 美 동성무공훈장(BSM) 등을 수상했다.
정삼열 박사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







